안병직 교수 증언록을 통해 본 ‘5대 시국사건’
입력2011.05.25. 오전 3:15
[동아일보]
“(박정희 시대 좌익운동과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 발표된 대부분의 보도내용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다.”
26일 출간되는 책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에서 4·19혁명 이후 좌익운동의 배경과 실상을 증언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좌익운동 이론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각 조직의 세부운동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9월 3일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정기학술포럼에서 비공개로 증언한 내용을 이번 책에서 공개했다. 안 교수는 1980년대 중반 과거 자신의 공산주의 추종이 잘못이었다고 밝히며 공개 전향을 선언한 바 있다.
○ 인혁당은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
안 교수는 1964년 8월 수사기관이 발표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으로 평가했다.
증언에 따르면 안 교수는 1962년 대학원에 진학해 빨치산 출신의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교육을 받았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저술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의 사상에 따라 결국은 민족주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다.
인혁당의 조직 목적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던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그는 평가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인혁당이 박범진 전 의원 등을 중심으로 이들 운동단체에 하부조직을 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지난해 박 전 의원이 인혁당의 실재에 대해 증언한 것을 상기시키며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증언했다.
○ 통혁당은 북한 지령으로 결성된 혁명조직
자생적 조직인 인혁당과 달리 통일혁명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었다고 안 교수는 증언했다. 통혁당은 북한에 혁명기지를 두고 북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청맥’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상당한 규모로 출발했다.
통혁당의 하부운동은 안 교수가 근무하던 서울대 상과대에서 가장 활발했다고 그는 밝혔다. 학생운동그룹 중에는 기독교학생운동을 하는 ‘경제복지회’가 있었는데 그 리더가 박성준 전 성공회대 겸임교수였다고 그는 전했다. 신영복 현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박성준을 지도했으며 통혁당의 서열 2위 김질락이 신영복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상과대는 통혁당 학생운동의 ‘본마당’이 돼 버렸다고 안 교수는 밝혔다.
통혁당이 발각되고 나서 가장 먼저 안 교수를 찾아온 사람은 박성준이었고, 안 교수는 자수를 하든지 종적을 끊고 최소한 10년 이상 지방도시에 숨어서 지내라고 했지만 결국 그는 남산으로 붙잡혀 왔다고 안 교수는 증언했다.
한편 안 교수의 증언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신영복 교수의 자택과 연구실로 24일 종일 전화를 걸었지만 신 교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박성준 전 교수가 현재 운영하는 서점에서 휴대전화번호를 확인해 그에게도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 처벌이 과도했던 2차 인혁당 사건
안 교수는 1974년 4월 25일 발표된 2차 인혁당 사건은 인혁당을 재건하려던 좌익조직이 당시 유신반대운동을 전개하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지도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민청학련을 지도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게 안 교수의 평가다. 1970년대 학생운동은 이미 스스로 운동의 목표를 정확하게 이해할 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분석했다.
재판 결과 인혁당은 최종적으로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 등으로 관련자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민청학련의 학생 리더에게도 사형(7명), 무기징역(7명), 징역 15∼20년(18명)의 중형이 선고됐다.
이에 대해 안 교수는 “이 같은 형량은 사법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인혁당이 재건됐다고 하더라도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형의 집행과정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다만 안 교수는 “2차 인혁당이 결성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맞다”면서 “실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 혁명자금 마련하려 강도짓까지 한 남민전
1979년 10월 발각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의 중심인물은 이재문(옥중 사망)과 신향식이었다. 이재문은 인혁당 관련 인물이고 신향식은 통혁당 관련자라고 안 교수는 전했다. 이들은 한국사회를 순수한 ‘미제의 신식민지’로 인식하고 무력투쟁으로 해방시켜야 할 대상으로 봤다고 안 교수는 증언했다.
당시 경찰 발표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에서 북한의 재일공작원과 접선해 3억 원의 자금을 요구했다. 재일공작원은 남민전의 존재를 입증해 보이라며 1978년 1월 초 서울시내에 삐라를 살포하라고 지령했으며 실제로 남민전은 그 지령에 따라 같은 해 1월 6월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명의로 반정부 삐라 500장을 살포했다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남민전과 북한의 연합전선은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이후 남민전은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였고, 1979년 8월 말 서울시내에 삐라를 살포하다가 아지트가 발각됐다. 이때 이재문 김남주 이수일 이문희가 체포되고 사제폭탄 1개, 다이너마이트 1개, 권총 1정 및 실탄 150발 등이 압수됐다.
안 교수는 “이들은 처음부터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는 등 인민민주주의운동, 즉 공산주의 혁명이 궁극적 목적이었다”며 2006년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이들의 강도 행적까지도 민주화운동으로 간주해 남민전 관련자 29명에 대해 민주화운동 공로자로 인정한 것은 문제라는 견해를 밝혔다.
○ 20년간 지하 잠복했던 김정강그룹
안 교수는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김정강그룹 사건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1979년 12월에 발각된 이 조직은 구성원이 50명 정도로 꽤 큰 조직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정강은 4·19 직후부터 학생운동 리더로 활동했는데 우수한 학생운동 리더들이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도록 지도했다. 이들은 길게는 10년 정도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매우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고 안 교수는 전했다. 이 때문에 20년 가까이 지하에 잠복하면서 세를 확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증명할 구체적 물증이 없어 조사과정에서 대부분 석방됐고 최종적으로 2명만 재판에 회부돼 1∼2년의 금고형을 받았다고 안 교수는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민주주의적 분위기가 고조되던 당시 정세의 덕을 본 것이라고 안 교수는 해석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
:: 안병직 교수는 ::
―1936년 경남 함안 출생
―1964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
―1965∼2001년 서울대 경제학과 경제학부 교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조사받았으나 무혐의로 석방
민주당과 진보당에 인민민주주의 신봉에 학생운동 출신자들 많이 있죠.
김일성 찬양고무 전모씨 킄
보천보전투 금인쇄원판
만들어서 북괴의 누구한테 선물했더라 하하하
혹시 이거 말하는 거야? ㅎㅎㅎㅎ
‘이 한 장의 사진’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45792
“북한인권개선과 우파혁신에 매진하겠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조국통일위원회 간부였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89년과 1991년 두 차례 징역형을 살았던 하 의원이 민주통합당도 통합진보당도 아닌 새누리당을 선택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의아해 했다. 전대협 동지였던 한 민주통합당 의원은 그를 “변절자”라고 평가절하기도 했다. 하 의원은 “내가 국회에서 하고 싶은 일은 북한 인권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당과 진보세력은 북한 인권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또 한미 FTA나 제주 강정기지 등 큰 사안들에 있어 새누리당과 의견이 비슷했기에 이쪽을 선택하게 됐다”고 밝혔다. 주사파 대부였던 김영환 씨가 북한인권운동가로 전향한 것처럼 그 역시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학창 시절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북중 국경에 위치한 지린대학교 유학 시절 수많은 탈북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하 의원은 기억에 남는 탈북자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탈북했다고 해서 결코 나은 삶을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강가에 돌을 주워다 성경구절을 새겨 관광객들에게 파는 아이들부터 국경 지대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오는 아이들이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태영호 찾아? ㅎㅎㅎㅎ
이런 애가 국회의원까지 하다가 이번에 낙선했다며? ㅎㅎㅎ
<그래픽> 탈북 태영호 주영 공사 가계도
https://www.yna.co.kr/view/GYH20160818001400044
그러게....
북한의 형제국하고 수교를 맺었네? ㅎㅎㅎㅎ
괜찮아? ㅎㅎㅎㅎ
극비리 진행된 쿠바 수교 전격 합의…'K컬처'가 결정적 역할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165567
우리나라가 '북한의 형제국'으로 불리는 쿠바와 수교했습니다. 정부는 막판까지 극비리에 협상을 진행하다 한밤중에 깜짝 발표를 했는데요. 특히 K팝과 드라마 같은 우리 대중문화가 수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베트남에게 돈 퍼주던데...
윤석렬이도 괜찮다는 거야? ㅎㅎㅎ
[속보]尹 "베트남 환경·보건·교육 지원에 2억불 규모 무상원조"
https://www.fnnews.com/news/202306231224587127
한국, 베트남에 40억달러 유상원조... 희토류 협력 강화한다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3/06/23/3MHE5U3K2NFXNPK46PIFMMWGVA/
윤 대통령, 오늘 한-베트남 정상회담…새 무상원조사업 발표
https://www.news1.kr/articles/5085746
그러니까 말이다... ㅎㅎㅎㅎ
국민의힘에서는 언제적 프레임이냐고 했네? ㅎㅎㅎㅎ
너처럼 똑똑한 애들이 모두 아는 사실을 국민의힘도 몰랐나봐...ㅎㅎㅎ
니가 봐도 너의 똑똑함을 국민의힘이 못따라오는 것 같지? ㅎㅎㅎㅎ
"언제적 프레임이냐"…국힘 '종북 현수막' 걸려다 긴급 철회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171683&pDate=20240326
국민의힘에서는 '종북 현수막'을 달라고 했다가 후보들 반발로 하루 만에 철회했습니다. 수도권 후보들 사이에서 "언제적 종북이냐" "선거에 도움 안 된다" 불만이 나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니까 너는 어느쪽인데? ㅎㅎㅎ
후배들에게 전쟁을 물려주고 싶은거야? ㅎㅎㅎㅎ
1. 통일을 한다
1.1 전쟁으로 통일한다.
1.2 평화적으로 통일한다.
2. 통일을 하지 않는다.
2.1 후대에게도 전쟁 상태를 물려준다.
2.2 종전을 통해 후대에게는 전쟁을 물려주지 않는다.
ㅎㅎㅎㅎ
너도 은근 글을 지우더라? ㅎㅎㅎㅎ
너도 니글이 창피한가봐? ㅎㅎㅎㅎ
한번 체크해볼까? 얼마나 지우나?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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