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장군
1898~1980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차장 겸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과 광복후 외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1898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 출생
1918년 정주 오산학교 수석 졸업한뒤 경신학교 교사로 부임.
중국상해로 망명 후 귀주성 육군강무학교를 거쳐 중국군 장교로 임관.
1920년에 상해독립군 군비단에 투신.
이듬해 일본군과의 천보산 전투에서 승리한 뒤 시베리아 이만으로 옮겨 대한의용군 군사위원회를 조직,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2년 러시아 볼세비키 세력에 의해 부대가 해체되자 만주로 이동, 용정의 명동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26년 중국 국민혁명군에 복직.(최종 계급 소장 2스타)
1931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제공, 거사를 지원.( 김구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
1940년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 1948년 8월 귀국, 건국후 최초의 장성인 육군준장에 임관.
육군사관학교교장 육군참모학교장을 거쳤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방어전을 지휘.(1일도 버티기 어려웠지만 무려 6일간 방어에 성공하여 미군의 국내 진입 성공)
1961년 5·16직후 혁명정부의 외무장관을 역임. 1967년 신민당으로 정계에 투신, 7·8대 국회의원.(박정희의 독재에 반대 하여 한독당 창당)
1973년 1월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으나 80년엔 국정자문위원과 국방부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러니 더 알립시다.
그러니 더 알립시다.
친일파 기준에는
독립군 때려잡고..
해방후에는.승만이나.미군정에.빌붙어
살고
반공외치며
전대갈때까지
빨갱이 타령으로
자신의.영달을 위해
매진한 인생이라야함
이나라 친일파 모두는 면죄를 받을수 있지
그시절 단연 대한민국
최고의 장군님 이시죠,
라고 룬정부에서 막을 것 같네요..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