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에 적힌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
아버지는 평생 짠돌이였다.
친구들과 밥을 먹고도
커피 한 잔 사는 법이 없었고,
어머니가 옷 한 벌을 사면
그 돈이면 쌀이 몇 포대냐며 잔소리를 했다.
내가 어릴 때는 용돈을 달라고 해도
아버지는 늘 같은 말을 했다.
"돈은 쓰는 게 아니라 모으는 거야."
그런 아버지가 나는 참 싫었다.
친구들 아버지는 새 운동화도 사주고,
가족끼리 외식도 자주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돈 이야기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그동안 아버지는 늙어갔다.
어느 날, 아버지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예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평생 가족을 위해 일했던 손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미안하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다.
"뭐가 미안해요?"
아버지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아버지가 해준 게 별로 없어서."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평생 하지 못했던 말들이라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며칠 뒤,
아버지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가
낡은 통장 하나를 내게 건넸다.
"이거 네 아버지가 나한테 주라고 했어."
통장은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날짜마다 돈이 입금되어 있었다.
어떤 날은 1,500원.
어떤 날은 2,000원.
또 어떤 날은 3,000원.
금액은 작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어머니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출근할 때 쓰던 버스비하고 점심값이야."
"그걸 왜 통장에 넣어요?"
어머니는 눈물을 훔쳤다.
"점심을 굶기도 하고,
가끔은 먼 길을 걸어 다녔어.
그렇게 아낀 돈을
매일 통장에 넣었더라."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돈을 아끼던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다니.
그런데 통장에는
돈보다 더 이상한 것이 있었다.
입금 내역 옆에
짧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도 열심히 살자.'
'우리 아들 운동화 사주는 날.'
'아내 생일. 꽃 한 송이라도 사주자.'
'아들이 취직했다. 세상에서 제일 기쁜 날.'
나는 한 장 한 장 넘겼다.
'오늘 아들이 아빠한테 화를 냈다.
내가 너무 무뚝뚝했나 보다.'
'아들한테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이 왜 이렇게 어렵지.'
그리고 마지막 장.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적은 글이었다.
'이제 돈 쓸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그 아래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평생 돈을 모으면
가족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보니
돈보다 더 많이 모아야 했던 건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었나 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내 아들아,
아빠는 너를 참 많이 사랑했다.
그 말을 살아 있을 때
더 많이 해줄 걸 그랬다.'
나는 통장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아끼던 돈은
나에게 큰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 돈은
하루의 점심이었고,
버스 대신 걸었던 길이었고,
가족에게 해주고 싶었던
작은 선물 하나였다.
나는 평생 아버지가 돈밖에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아버지는 돈을 모은 게 아니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돈으로라도 그 마음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아버지의 통장을 꺼내 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읽는다.
'내 아들아,
아빠는 너를 참 많이 사랑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묻고 싶다.
아버지.
그렇게 힘들게 모으지 않아도 됐는데.
나는 돈이 없어도 괜찮았는데.
새 운동화가 없어도 괜찮았고,
맛있는 음식을 못 먹어도 괜찮았는데.
그냥 아버지가 내 옆에
오래오래 있어 주기만 했다면
그걸로 충분했는데.
아버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아버지가 평생 모았던 건 돈이 아니라
우리 가족을 향한 사랑이었다는 걸.
그런데 아버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왜 나는 꼭 아버지가 떠난 뒤에야
알게 된 걸까요.
오늘도 나는 아버지의 통장을 펼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작게 말한다.
"아버지, 나도 열심히 살게요.
아버지가 그렇게 아끼며 살아온 세상에서
나도 아버지 몫까지 행복하게 살게요."
통장에는 이제 더 이상
돈이 입금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 적힌 아버지의 마음은
내 평생 다 써도 모자랄 만큼
아직도 가득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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